sungyup's.

고도를 기다리며
Samuel Beckett·오증자

고도를 기다리며

인간은 기다린다. 고로 존재한다.

May 21, 2025

BookFrench Literature

들어가며

워낙 유명한 책인지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드문드문 했었다. 다만 무슨 내용의 책일지는 전혀 몰랐다. "고도? 무슨 비행기 파일럿과 관련된 얘긴가?"하고 생각했을 정도니.

책을 처음 읽고 나서는 이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읽기 전보다 더 궁금해졌고(물론 읽기 전에 생각하던 그런건 아니었다는건 알게 되었다), 관련해서 인터넷에서 여러 해설들을 접한 후 다시 책을 읽어보았다.

다시 읽으면서 (그리고 처음 읽을때 무심결에 지나갔던 부분들에 자주 흠칫흠칫 놀라면서) 들었던 생각은,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도, 고도가 뭔데?

그래도, 그 기다리는게 고도잖아. 고도가 뭔데?라고 물어보실 수 있다.

나보고 답하라면, 답을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 작가부터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연출가 알랭 슈나이더는 이 희곡을 연출하기 위해 작가에게 직접 물어봤으나, 베케트는 '나도 그게 뭔지 알았으면 작품에 구체적으로 표현했을텐데 나도 그걸 모른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럼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가장 흔한 해석은 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고도(Godot)라는 이름은 영어 단어인 God(영어)과 Dieu(불어)를 합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특히 발음 측면에서 더더욱). 책에서 성경책의 이야기들(예수와 두 도둑이라던가, 어디서 읽고 인용하고 있는지 등장인물 본인은 기억은 못하지만 전도서의 구절)이 나온다거나, 매일 대리자(소년)를 보내 내일은 반드시 오겠다고 하지만 오지 않는 고도는 기독교의 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뮈엘 베케트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일랜드어로 영원(Forever)를 뜻하는 단어가 Go Deo임을 연상해볼 수도 있다. 영원을 기다리다.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다. 영원히 기다리다. '영원'은 하루만에 나무에서 잎사귀가 자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50년간 기다려왔고 앞으로도 계속 하릴없이 기다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과 어울리는 단어다.

아일랜드어로 Go Deo
아일랜드어로 Go Deo는 영원을 의미한다. 하지만 철자가 비슷한 것과는 달리, 발음은 '고도'와는 꽤 다르다.

실제로 연극을 관람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처음에 이 연극이 상연되었을때, 많은 사람들은 매혹을 느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연극에 관심이 많아 작은 연극 무대까지도 찾아가면서 보던 '배운' 사람들 또한 화를 내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산 퀜틴 형무소에서 이 희곡을 상연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연출가 임영웅과 관객과의 대담
이미지 출처 : #
산 퀜틴 교도소의 일화는 이 작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형무소에서 이 '어려운' 연극을 상연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물어보니 '우리처럼 그냥 출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헛소리하면서 시간 떼우는거 아니냐'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연극을 즐긴 흉악범들에게 고도는 출소였다.

이렇게 고도는 신이나, 영원이나, 형무소 출소나 무엇으로 해석해도 다 말이 된다. 고도를 무엇으로 생각하든 상관 없이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다 말이 된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고도보다도 기다림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즉, 고도는 그저 기다림의 대상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고도의 형상, 즉 구체적인 기다림의 대상은 독자, 또는 관객 각자에게 달렸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생각으로 '고도가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은 이 책의 주제를 벗어나는 질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는 기다림

이 희곡이 특정 시대의 특정 관객들에게만 있는 기다림(예를 들면, 작가가 처했던 상황처럼 나치 치하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기다리는 해방)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들의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구체적인 기다림의 대상을 각자의 해석에 맡긴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럿 있다.

우선, 등장 인물들의 이름과 성격이 특정 집단에 제약되어 있지 않다.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사람 이름, 에스트라공은 프랑스 사람 이름, 포조는 이탈리아 사람 이름, 럭키는 영국이나 미국 사람 이름으로 이들 집단은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성격도 다 달라 특정한 집단을 상징한다고 보기 어렵다. 블라디미르는 머리를 덮어주는 모자를 중시하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이성적인 캐릭터다. 에스트라공은 답답하게 자신의 발을 옥죄는 신발을 벗어던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때로는 배가 고프다고 하고 잠도 자며, 블라디미르에게 충동적으로 헤어지는게 낫지 않겠냐고 하는 감정적인 캐릭터다. 포조는 지배층이고 그의 노예 럭키는 피지배층이다. 공통점이 있다고 보기 힘든 주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이 이야기는 특정 집단이라기보단 보편적인 인류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또, 희곡이 쓰인 언어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뮈엘 베케트는 모국어가 아닌, 자신이 배운 언어인 불어로 원작을 쓰고 이후에 영어로 자신의 작품을 번역한다. 베케트는 모국어보다 습득해서 배운 언어가 스타일 없이 쓸 수 있어 쉽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자신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모국어로 작품을 써내려가면 자기 자신의 사고가 해당 언어를 쓰는 집단의 역사와 문화에 갇힐 것임을 알고 이 제약을 뛰어넘어 인류 보편의 이야기를 쓰기 위함이다.

극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간 역시 어느 특정한 장소라고 말하기 어려운 곳이다. 극의 배경을 알리는 시작은 이렇다: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제 1막(p.9)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은 아무곳도 아닌 곳이기에 모든 곳일 수 있는 곳이다. 시간 역시 모호한데, 신약 성경 얘기들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기원 후라는 사실만 알 수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하릴없는 기다림

공간과 시간이 모호하기에 희곡의 배경은 마치 비현실적인 가상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적 배경 뿐 아니라 시간 감각도 굉장히 모호하다. 예를 들어, 하루 밤만에 나무의 잎이 자란다. 등장인물들 또한 시간 감각이 없다.

포조: (버럭 화를 내며)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제 2막(p.154)

루프물처럼 계속해서 끝없이 반복될 것만 같은 이야기도 시간 감각을 더 없게 만들며 배경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총 2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에서 1막과 2막의 구성은 아래와 같이 거의 똑같다.

  1.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같은 장소에서 만나 고도를 기다리며 쓸데없는 소리들을 늘어놓는다.
  2. 럭키와 포조가 지나간다.
  3. 소년이 나타나 고도씨가 오늘은 못 오지만 내일은 반드시 온다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4.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 얘기를 듣고 이제 가자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린 소년이 겁먹은 표정으로 나타난다. 걸음을 멈춘다.
소년: 알베르 아저씨는요?
블라디미르: 나다. (...중략...)
소년: (단숨에) 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
제 1막(p.88)
소년: 아저씨...... (블라디미르가 돌아선다.) 알베르 아저씨는......
블라디미르: 다시 시작이로구나. (사이. 소년에게) 너 나 모르겠니?
소년: 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 너 어제도 왔지?
소년: 아니요.
블라디미르: 그럼 처음 오는거냐?
소년: .
침묵.
블라디미르: 고도 씨가 보낸 거지?
소년: 네.
블라디미르: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소년: 네.
블라디미르: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고?
소년: 네.
블라디미르: 내일은 틀림없겠지?
소년: 네.
제 2막

소년 뿐 아니라, 블라디미르를 제외한 모든 등장 인물들은 기억력이 없거나 아주 희미한 기억만을 유지한다. 예를 들어 에스트라공은 누구한테 맞고 다니는건지 기억을 잘 못하고, 포조와 럭키는 블라디미르를 처음 본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하나의 사실만큼은 잊지 않는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말이다.

블라디미르: 우리가 장소를 잘못 알기라도 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이리 오기로 돼 있는데.
블라디미르: 딱히 오겠다고 말한 건 아니잖아.
에스트라공: 만일 안 온다면?
블라디미르: 내일 다시 와야지.
에스트라공: 그리고 또 모레도.
블라디미르: 그래야겠지.
에스트라공: 그 뒤에도 죽.
블라디미르: 결국......
에스트라공: 그자가 올 때까지.
블라디미르: 너 지독한 놈이로구나.
제 1막(p.19)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것

에스트라공: 난 피곤하다. (사이) 가자.
블라디미르: 가선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사이) 그러면 무얼 한다?
블라디미르: 하긴 무얼 해?
에스트라공: 하지만 난 더는 못 버티겠다.
제 2막(p.117)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별의 별 쓸데없는 소리와 쓸데없는 짓들을 한다.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지어내고 행동들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은 지쳐 "그래... 그럼 이제 갈까?"라고 얘기하고, 그럴 때마다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에스트라공은 이에 수긍한다.

에스트라공: 자,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어.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제 1막(p.18)

이들의 이 대사 시퀀스는 교향곡에서 대주제가 반복되는 것처럼 극 전반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에스트라공: 이젠 뭘 하지?
블라디미르: 글쎄 말이다.
에스트라공: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제 1막(p.82)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너무 지루한 나머지 자살 시도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하기도 한다.

블라디미르: 이젠 어떡하지?
에스트라공: 기다리는 거지.
블라디미르: 그야 그렇지만 기다리는 동안 뭘 하느냐고?
에스트라공: 목이나 매고 말까?
블라디미르: 그러면 그게 일어서겠지.
에스트라공:(호기심이 생겨) 그게 일어선다고?
제 1막(p.24)

극 마지막에는 둘다 너무나 지쳤는지, 체념하면서 보다 진지하게, 다시금 자살을 제안한다.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 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거지.
제 2막(p.162)

하지만 이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똑같은 기다림의 반복이다. 1막과 2막은 모두 이렇게 끝난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제 1막(p.93)과 제 2막(p.162)의 마지막,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사

이 결말로 우리는 3막이 있어도, 4막이 있어도 똑같이 이들은 죽기 전까지 계속 고도를 기다릴 것이라는 것, 그리고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이 고통스러운 기다림은 자살 외에는 출구가 없는걸까?

카뮈가 주는 힌트 - 희망

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은, 작품이 쓰인 시대와 배경을 고려하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세계 대전이 끝나기를 바라는 레지스탕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베케트는 레지스탕스 소속이었는데, 이 당시 같이 교류하던 작가 중 알베르 카뮈가 있었다. 카뮈는 세계 대전 당시에 쓴 시지프 신화에서 이 당시의 베케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힌트들을 준다. 시지프 신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바위를 계속 산 정상으로 밀어야하는 시지프스의 이야기는 삶에 대한 알레고리다. 삶은 무의미함과 고통의 반복이고, 죽을때까지 그 탈출구는 없다. 그렇기에 카뮈는 자살을 유일한 진지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카뮈는 이렇게 시지프 신화를 끝낸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상상하여야 한다.

삶은 무의미와 고통의 반복이지만,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무의미와 고통을 벗어나려고 몸부림 칠 필요가 없다. 그 무의미함을 사랑하고 행복하다고 상상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수 있다. 그런 비관적인 진리를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고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냐고.

첫번째 희망 - 낙관적 상상력

카뮈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낙관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이다. 주변에서 보기에 아주 불행해보이는 사람도, 본인 앞에는 낙관적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버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기다림 아닌가? 기다림이란 희망적인 상상을 하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이 행복한 상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개인적으론 처음 읽었을 때는 실없는 소리들 중 하나인줄 알았지만, 다시 읽었을 땐 아주 놀랐던 대사가 있다. 극 초반에 블라디미르가 에스트라공에게 해준 예수와 두 도둑 이야기다:

블라디미르: 도대체 어떻게 됐길래 복음서를 쓴 네 사람 중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어쨌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 놓았거든.
(...중략...)
블라디미르: 그러니 두 놈이 다 저주를 받았을 거거든.
에스트라공: 그런데?
블라디미르: 그런데, 복음서를 쓴 친구 중 하나만은 그자들 중의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그래? 그렇다면 그 친구들 견해가 서로 다른 거지 뭐. 얘긴 단지 그것뿐이지 뭐야?
블라디미르: 넷이 다 거기 한 자리에 있었다니깐.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 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깐.
에스트라공: 누가 믿는다는 거야?
블라디미르: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잖아? 그 사람의 해석 밖에 모르고 있다니까.
에스트라공: 사람들이 다 바보니까 그렇지.
제 1막(p.18)

신약 성경 맨 처음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다. 이 중에서 단 하나만 도둑 둘 중 한 명이 구원을 받았다고 썼는데, 사람들은 그 한 복음서에만 나온 얘기를 믿는다. 에스트라공은 말한다: '사람들이 다 바보니깐 그런거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바보같이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낙관적인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력은 인내심을 주고, 행복한 미래를 기다리는 과정(= 삶)을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두번째 희망 - 함께 있다는 것

고도가 올 것이라는 소년의 허황된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 외에도 이들이 버티는데 힘이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서로의 존재다.

블라디미르: 하긴...... 오래전부터 늘 생각해 온 건데...... 넌 내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말이지...... (단호하게) 지금쯤은 죽어서 한 움큼의 뼈다귀만 남았을걸, 틀림없이.
에스트라공: (정곡을 찔린듯)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제 1막(p.11)

극의 너무 초반부에 나와서 처음 읽었을 땐 그냥 하는 소린줄 알았지만, 두번째로 읽었을 때 이 대사는 (정곡을 찔린듯) 굉장히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블라디미르가 없었다면 에스트라공이 이렇게까지 고도를 기다릴 수 있었을까?

이 서로의 존재가 주는 위안이라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포조와 럭키에게도 해당되고, 심지어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에스트라공과 럭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1막에서 럭키가 울음을 그치고 에스트라공이 울기 시작하자 포조는 이렇게 말한다:

포조: 이젠 울음을 그쳤군. (에스트라공에게) 그러니까 당신이 저놈을 대신하게 된 거구려. (생각에 잠긴듯)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 웃음도 마찬가지요. (웃는다.) 그러니 우리 시대가 나쁘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라고 해서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말이오. (침묵)
제 1막(p.52)

언뜻 이 대사는 누군가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슬픔이라는 식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에 변함이 없다는 얘기는, 만약 혼자만 있다면 그 사람이 세상의 모든 눈물을 끝없이 흘려야한다는 얘기다. 이 대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얘기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에스트라공은 자꾸 떠난다는 말을 하지만 실제로 떠나지는 못한다. 둘은 서로를 매일 만나면서도 만날때면 격하게 반가워한다. 하릴없이 고도를 기다리지만, 이들에겐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서로가 있는 것이다.

에스트라공: 그래, 그동안 우리 흥분하지 말고 얘기나 해보자꾸나. 어차피 침묵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
블라디미르: 맞아.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거야.
에스트라공: 그래야 생각을 안 하지.
블라디미르: 지껄일 구실이야 늘 있는 거니까.
에스트라공: 그래야 들리질 않지.
블라디미르: 우리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까.
에스트라공: 모든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블라디미르: 날개 치는 소리가 들린다.
제 2막(p.107),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사

함께 얘기를 하고 공동의 목표를 가진 존재가 있음으로 인간은 기다릴 수 있다. 즉, 무의미함과 부조리를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 죽은 사람조차 제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한다:

블라디미르: 무슨 얘길 하는 걸까?
에스트라공: 제 인생의 얘기겠지.
블라디미르: 살았던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지?
에스트라공: 그 얘기를 꼭 해야겠다는 거지.
블라디미르: 죽었으면 그만일 텐데.
에스트라공: 그걸로는 부족한 거야.
제 2막(p.108)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인생의 무의미함을 버텨내는 것, 즉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포조는 이 일을 정말 간략하게 한 줄로 설명한다:

포조: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제 2막(p.154)

곧 죽을 사람들이 새 생명을 낳고, 아침이 왔다가 밤이 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사라는 것이다. 즉,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무의미한 시간을 반복적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개인은 거시적인 관점으로 살지 않는다. 인생이 본질적으로 아무리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해도, 개인은 희망을 상상하며 살 수 있다. 함께할 사람들이 있다면, 사소한 일들에 의미를 붙이며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다.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나 번식을 위해 살아가는 동물들의 무의미함과 차이를 둘 수 있다.

블라디미르: 우린 약속을 지키러 나온 거야. 그거면 된 거다. 물론 우린 성인군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을 지키러 나온 거란 말이다. 이 정도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 2막(p.137)

즉, 고도를 기다리는 개인은 무의미한 인생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과 서로 의존하며 희망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래서 희망적이고 기쁜 일인가, 암담하고 슬픈 일인가? 희극인가, 비극인가?

사뮈엘 베케트는 본인의 작품에 대해 희비극(Tragicomdedy)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생은 복잡하다. 희극도 있고 비극도 있는, 양면성을 모두 갖춘 것이 인생인 것이다. 아까 포조도 무덤과 출산, 낮과 밤을 모두 말하지 않았던가.

나오며

살다보면 인생이 참 막막하고, 답이 없을것 같은 때가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보여준다. 인생은 막막하고 답도 없는게 맞다고.

하지만 또 보여준다. 원래 인생이란건 올지 안 올지, 아니 뭔지도 사실 모르겠는 희망을 상상하며, 주위에 있는 사람과 서로 의존하며 기다리는 과정이라고. 블라미디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고도가 실제로 오더라도 자기가 기다리던 고도가 맞는지도 모를것이라고 스스로 얘기한다.

포조: (단호하게) 고도는 누구요?
에스트라공: 고도라뇨?
포조: 날 고도로 잘못 보지 않았소?
블라디미르: 천만에요. 선생님,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일 없습니다.
포조: 그게 누구냐니까?
블라디미르: 그건..... 저...... 그냥 아는 사람이죠.
에스트라공: 알긴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랍니다.
블라디미르: 그러믄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에스트라공: 저 같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다린다.

극속에서 고도는 오지 않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무에선 잎사귀가 자랐다. 세상이 변해도 고도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에 희망 역시 계속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