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w He Sings, Now He Sobs
들어가며
2015년, 그러니깐 대학교 3학년 때였던가, 당시 네이버의 한 블로그에서 음반을 수입해 아주 싸게 팔았다. 정식 앨범 같은데 3장에 20,000원, 10장에 50,000원 이런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해당 블로그를 발견하자마자 '횡재다!'라고 생각하고 오랜 시간을 돌아봤다.
클래식 음반들이 주를 이뤘지만 재즈 음반들도 꽤 보였는데, 사실 별로 아는 게 없었던 때인지라 우선 피아노 연주자들의 음반인 것으로 보이는 것을 찾았고, 들어본 연주자의 음반이면 구글이나 네이버에 검색해 평가를 대충이라도 보고 샀던것 같다. 그 중 이 음반은 물론 평가가 아주 높은 음반이었기에 아주 초기에 샀다.
'Steps', 'What Was', 'Matrix'... 이 곡들은 모르겠는데... 아! 'My One and Only Love'는 안다! 사자! 이러면서 샀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곡은 마케팅 목적으로 1988년에 재발매하며 끼워둔 곡이었고, 그 마케팅은 내게 적중했다.
배경: 동서고금을 뛰어넘은 시적 심상
앨범 부클릿에도 적혀있지만, 퍽이나 인상을 남기는 제목인 Now He Sings, Now He Sobs는 역경(I Ching)이라고도 불리는 주역(Book of Changes)의 61괘 풍택중부(風澤中孚)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六三은 得敵하야 或鼓或罷或泣或歌로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육삼은) 적(enemy)을 만나서 북을 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Now He Beats the Drum, Now He Stops는 4번 트랙의 제목이다), 울기도 하고 노래하기도 한다(타이틀 곡이자 3번째 트랙 Now He Sings, Now He Sobs)."라는 뜻이다.
인터넷의 여러 주역 해석에 의하면 풍택중부란 속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믿음(중부)이 서로(바람과 연못)를 감화시킨다라는 의미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번역한 구절은 감정의 변화가 극심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중심을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구절이다.
사실 칙 코리아가 아무리 재즈 피아노의 거장이고 천재라지만 2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중국 고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 구절을 차용했을 것이라 생각하긴 좀 어렵다. 칙 코리아의 정확한 표현에 따르면, 이 말이 주는 시적인 심상(poetry of that phrase)이 구상하고 있던 피아노 트리오 음악에 잘 맞았고, 인생의 희로애락이라던가 감정의 변동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쓴 말이라고 한다.
The poetry of that phrase fit the message of the trio's music on Now He Sings, Now He Sobs to me. You know, the gamut of life experiences — the whole human picture and range of emotions.— 칙 코리아, the making of Now He Sings, Now He Sobs에서
앨범 부클릿에 있는 칙 코리아의 메모를 보면 앨범에 등장하는 다른 곡들의 제목(Steps, What Was, Matrix, The Law of Falling and Catching Up)도 어떻게 지어졌는지 볼 수 있다. 이 메모는 세상은 계속 변하며 사람이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 법칙을 통해 성장하며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인데, 후에 사이언톨로지교에 귀의할 칙 코리아가 20대에 어느 정도 영지주의적(사람이 신적 존재에서 왔으나 물질 세계로 떨어졌고, 진정한 앎을 통해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During the course of steps, he learns The Law of Falling and Catching Up.
He begins to see how What Was always was and changes as its waves of energy converge to form a new tonal matrix form which he comes again.
Because he sees, with great clarity, The Law of Falling and Catching Up, he completes the steps in the right time and mounts toward the Matrix from which he originally came.— 앨범 부클릿에 적혀 있는 칙 코리아의 메모

칙 코리아가 주역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는 있어도, 높은 차원의 정신끼리는 말 그대로 동서고금도 뛰어넘어 통하는게 있는걸까? 녹음 당일 처음 만난 베이스의 미로슬라브 비투오시와 드러머 로이 헤인즈는 속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믿음을 통해, 아주 오래된 동양의 모호한 시구에 영감을 얻어 빠르고 변화무쌍한 곡들과 아방가르드 재즈곡까지 모두 기적처럼 아름답게 연주해냈다.
이들의 연주는 명반이 쏟아진 찬란한 포스트밥 시대였던 1960년대에서도 피아노 트리오 분야에서 빛나는 명연 중 하나로 기억된다. 바람과 연못이 서로를 감화시키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1번 트랙 전반부: Steps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주 정교하게 갈고 닦아서 만든 차가운 유리 구슬처럼 빛나는 칙 코리아의 피아노 터치와 속이 단단하게 가득 찬 팔분음표들이 개성 넘치는 각 곡들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단장하는지를 듣는 것은 아주 고급스러운 패션 쇼를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첫 트랙 Steps는 인트로부터 범상치 않다. 불길한듯 하다가도 밝아지고, 오묘하다가도 따스하고 명쾌해진다. 이 인트로는 이후에도 나올 보다 본격적인 아방가르드(반미학의 미학) 음악들, 즉 Now He Beats the Drum, Now He Stops의 인트로나 The Law of Falling and Catching Up의 전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렬한 하강 아르페지오로 시작하고 올라가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떨어지고 올라가는 법칙이라는 화두를 시작에서 던진것은 아닐까하고도 생각해본다.
인트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Steps는 코드 진행에서 스페니쉬 느낌이 들면서도 4도 보이싱들과 펜타토닉 스케일, 살짝 나갔다 오는 playing out으로 인해 맥코이 타이너의 느낌도 난다. 다만, 야생마처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중에 음역대도 높고 터치도 동글동글하고 깔끔해 맥코이처럼 가슴을 갈라 타오르는 심장을 보여주며 내면의 열정을 드러내는 느낌이라기보단 우아하고 세련된, 반짝이는 느낌이 든다.
트리오는 첫 곡부터 아주 강렬한 솔로와 인터플레이를 들려준다. 미로슬라브 비투오시는 거칠게 없이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며 워킹한다. 로이 헤인스의 라이드 심벌은 깃털처럼 예쁘게 찰랑거리지만 스네어는 긴장감을 조이며 타다다닥하며 부싯돌로 불꽃을 튀게 한다. 트리오는 거센 바람의 저항을 뚫고 빠르게 날아오른다.
개인적으로 이 곡이 특히나 만족을 주는 것 중 하나는 끝부분이다. 엄청나게 멋지게 달아오르고 그걸 유지했는데, 착지도 아주 우아하게 한다. 아름다운 오색 깃털을 가진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새가 자신이 화려하게 비행한걸 알고도 더 멋지게 보이려고 뻔뻔하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착지하는 것처럼, 이 트리오는 곡을 끝내고 빠져나오는 헤드를 잘 정리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달아오른걸 그대로 딱 멈춰버릴 수는 없었는지 헤드를 연주하곤 긴 드럼 솔로로 이어버린다.
이 드럼 솔로는 꽤 자유분방하고 리듬이 잘게 쪼개져 있는데도 Steps가 얼마나 폭주했는지, 드럼 솔로가 확실히 숨 돌리는 부분처럼 들린다. 만약 Steps를 듣지 않은 사람에게 드럼 솔로 부분을 들려준다면 어떤 연주의 절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번 트랙 후반부: What Was
그리고 나오는 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스페니쉬 왈츠인 What Was다. 이 곡은 Steps와 붙어서 나오지만 않았어도 칙 코리아의 다른 아름다운 왈츠인 Windows 만큼이나 사랑받을 인지도를 가지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한다. 주는 느낌도 비슷하게 쓸쓸하고 세련된 유러피언 감성이지만, 이 곡은 Windows와 비교하면 스패니쉬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더욱 시각적으로 들린다.
제목에서 주는 느낌(한때 있었던 것)처럼 허망한 느낌을 주는 이 아름다운 왈츠는 내게 벨라스케스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아주 아름답고 풍성해보이는 과일들을 보여주는 그의 정물은 vanitas, 즉 유한함도 동시에 보여준다. 지금 아주 신선하고 맛있어 보여도 그의 과일들은 영영 지속될 것 같지 않게 보인다. 칙 코리아의 이 곡도 우아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쓸쓸함은 그 순간에 빛나고 있는 우아함에서 온다.

2번 트랙: Matrix
Matrix는 이 음반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카피된 곡일 것이다. 이 곡은 철저하게 12마디 F 블루스 형식을 따르는 것 같지만, 전통적인 흑인 블루스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비단 '비전통적인' 멜로디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12마디 블루스는 첫 4마디에서 슬픈 사연을, 다음 4마디에서 비슷하지만 더 발전된 슬픈 사연을, 그리고 마지막 4마디에서 이러나 저러나 어쩔 수 없다 식으로 끝낸다.
가사가 없는 곡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Sonny Rollins의 Tenor Madness는 Bb 블루스인데, 처음 4마디에서 모티프를 제시하고 다음 4마디는 약간 변형된다. 그리고 마지막 4마디가 정리한다. Thelonious Monk의 Blue Monk도 Bb으로 자주 연주되는 블루스인데, 처음 4마디에서 올라가는 모티프를 제시하고 다음 4마디에서는 거기서 더 올라가고, 마지막 4마디에서 정리한다.

그런데 이 곡은 다르다. 처음 4마디가 쭉쭉 올라가는 모티프인데, 다음 4마디는 이와 전혀 관련없는 간주가 나온다. Matrix의 라이브 버전들을 들어보면 칙 코리아는 이 부분을 반드시 앨범처럼 연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4마디는 처음 4마디를 뒤집은 모양으로 떨어지며 정리된다.
만약 가사를 넣어보자면 첫 4마디에서 뭔가 밝은 사연을 들려주고, 다음 4마디에서 밝은 사연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는데 파멸적인 반전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4마디가 이 상황을 정리하는 느낌이랄까. 칙 코리아는 엔딩에서 이 반전 부분을 한번 더 이용한다. 첫 헤드에서 2번, 마지막 헤드에서 1번 들은 이 반전을 마지막 헤드 2번째 부분에서 이제 청자도 더 이상 반전이 아닌 요소로 기대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꼬아버려 반전을 주는것이다. 참고로 이 반전은 앞서 3번 들은 반전보다 더 파멸적으로 들린다.

아무튼 이 곡은 이런 특이하고 정교한 헤드가 아깝지 않은 걸작 솔로로 이어진다. 피아노 솔로 부분은 그야말로 단 한 순간도 버릴게 없다. 살짝 수줍은 듯 적은 수의 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는 계속해서 인상적인(비전통적인 방법으로) 멜로디들을 만들고 그걸 변형하는 식으로 솔로를 이어가다가 본격적으로 달린다.
라인 하나하나도 좋지만 칙 코리아의 피아노 터치에 대한 얘기를 이 곡 연주에선 특히 더 빼놓을 수 없을것 같다. 그야말로 속이 꽉 찬 보석이 은쟁반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듯한 아름다운 팔분음표들이 연주를 꽉 채우는데, 절정 부분에선 발을 약간 구르다가 아르페지오를 타고 쭉쭉 시원하게 올라가 피아노 88건반의 최고음 C를 찍고 전혀 끊김없이 클래시하게 떨어지는데 그야말로 들을때마다 카타르시스를 주는 (요즘말론 '도파민을 폭발시키는') 부분이다. 아마 이 음반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지금 내가 말하는 이 부분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 것이다(Matrix가 시작된지 2:20쯤 되는 거기 맞다). 마치 구름에서 점프해서 별을 한번 터치하고 구름에 다시 착지한 느낌이 든다.
이어지는 베이스 솔로는 약간 쉬어가는 느낌이고(Steps때의 드럼 솔로와 마찬가지로 꽤 격정적인 솔로이지만 워낙 달리다가 나온 솔로인지라 쉬는 느낌이 든다. 또, 피아노와 드럼이 없기에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 이후 나오는 피아노-드럼 트레이드는 두 천재의 맞대결이다. 특히 칙 코리아는 매번 창의적인 화두들을 던지는데, 일반적인 F 블루스였다면 나올 수 없는 라인들이며 오직 Matrix의 이 연주였기에 가능할 법한, 통일성을 가지고 일관적인 라인들이다. 그렇다고 도전적인게 없는 것도 아니다. 매 라인이 다 전혀 다르다.
아 또 하나 더. 솔로 중간에나, 트레이드 중에서나, 심지어 헤드에서나 칙 코리아의 보이싱은 정말 창의적인데다가(단순한 so what 코드나 fourth voicing이 아닌 경우가 많다) 적재적소에 등장해 묵직한 쾌감을 준다. 이 점은 비단 이 곡 뿐만 아니라 앨범 전체에 적용된다.
3번 트랙: Now He Sings, Now He Sobs
타이틀 곡인 Now He Sings, Now He Sobs는 길지 않지만 꽤 체계적이고 인상적인 인트로가 있다. 드럼이 특유의 비트를 연주하고 피아노와 베이스도 지정된 멜로디를 연주한다. 드럼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처음에 제목을 안 보고 음반을 들을 때는 이 곡이 Now He Beats the Drum, Now He Stops인줄 알았다.
곡 자체는 What Was처럼 쓸쓸한 스패니쉬 느낌의 왈츠이지만, 아무래도 타이틀 곡이라 그런지 솔로가 더 큰 규모의 감정 폭의 변화를 가져오기를 노리려는 인상을 받는다. 예를 들어 칙 코리아의 주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로이 헤인스는 확실히 여기에 호응해서 코드 보이싱과 드럼이 함께 나오며 분위기를 고조하려는 부분들이 이전 트랙들보다 눈에 띄게 빈도가 높다(물론 헤드에 이렇게 피아노와 드럼이 함께 가는 섹션이 있는 곡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칙 코리아는 8분음표, 셋잇단음표, 16분음표가 모두 개성이 있게 들리는데, 아마 이 모든걸 관통하는 공통점은 특유의 깔끔함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칙 코리아의 피아노는 부드러운 레가토이면서도 음 하나하나가 땡글땡글하고 정확한 박자로 음표들이 들어간다. 오스카 피터슨처럼 16분음표를 높은 빈도로 사용하진 않으나, 칙 코리아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정말 가끔 쓰는 편인데 카피를 해보면 혀가 내둘러지는 난도의 패시지를 구사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이후 나올 Windows를 이전에 카피해본 적이 있는데, 곡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다지 기교적으로 어렵지 않았는데 딱 한번 나오는 16분음표 패시지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다시 말해, 칙 코리아는 못해서 안 넣는게 아니라 할 수 있는데 효과를 위해 극도로 자신의 기교를 자제하고 있는 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칙 코리아도 이 곡에선 감정을 폭발시키고자 깔끔하게 넣기 도저히 무리인 길고 화려한 16분음표 상승 아르페지오를 겁도 없이 찔러 넣으려고 한다.(이 곡 3:29쯤) 약간 거칠었던 것이 아쉬웠던 건지, 좋았던 건지 모르겠으나 그는 3:42에 비슷한 느낌으로 또 한번 찔러넣는다. 피아노 기교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그 칙 코리아가 한계에 처절하게 들이받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로 어처구니 없이 어려운 아르페지오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들리는 트리오의 폭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단연 이 앨범의 절정이라고 할 만하다.
놀라운 것은, 그러고도 트리오가 차분을 유지해 정리한다는 것이다. Steps때와는 달리 칙 코리아는 착지를 분위기가 꽤 고조된 상태에서 한다. 이걸 이어 받는 것은 드럼이 아니라 베이스로, 베이스 솔로는 칙 코리아가 도중도중 보여준 것과 비슷한 느낌의 시퀀스들도 종종 들려준다. 이것 역시 에너지가 넘치는 솔로지만, 워낙 파워풀한 폭주를 이어 받은 것이라 쉬어가는 느낌이 든다.
4번 트랙: Now He Beats the Drum, Now He Stops
인트로가 가장 긴 곡이다. 물론 다음 곡만큼은 아니지만 꽤 아방가르드한 시도의 인트로로, 개인적으로는 아주 인상적이게 감상한 적은 없다. 하지만 How Deep is the Ocean의 콘트라팩트로 지어진 이 곡, Now He Beats the Drum, Now He Stops을 단장하기엔 이런 느낌이 가장 적절한것 같기도 하다.
사실 콘트라팩트가 아무리 헤드에서 원곡의 느낌을 잘 숨겼다고 해도, 솔로에서는 거의 같은 진행을 반복하면서 원곡의 느낌이 드러나는 경우를 종종 봤다. 하지만 칙 코리아 트리오는 아주 교묘하게 원곡의 느낌을 솔로에서도 철저히 숨겼다. 곡 자체가 전통적인 느낌이 거의 들지 않으며, 전반적으로 추상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당시로썬) 모던한 라인들과 기법들 위주로 풀어 나간다.
5번 트랙: The Law of Falling and Catching Up
가장 아방가르드한 곡이다. 맨 처음에 피아노의 가장 저음으로 마치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다가, 건반 외의 부분들도 활용해 다양한 소리를 내고 드럼과 베이스도 가세한다. 칙 코리아의 2년 뒤(1970년) 활동인 Circle의 전조를 볼 수 있는 곡이다. 엔딩에는 피아노의 가장 고음일 것으로 보이는 소리를 치는데 어느 정도 처음과 끝을 대칭적으로 만들고 싶어했던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트랙 단위로 감상한 적은 거의 없으며 앨범 단위로 들을 때 가끔씩 들은 연주인데, 들을 때면 새삼 '음악'이 아닌 '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즉, 피아노 건반으로 연주한 음조차 나무를 깊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며, 새삼 이게 피아노로 연주한 어떤 '음'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소리'임을 인지하는 경험을 한다.
나머지 트랙들
나중에 추가된 곡들이긴 하지만 추가된 트랙들도 아름답고 개성있는 연주들이다. 아무래도 첫 다섯 곡들이 주는 통일성에는 끼기 어려운 곡들도 있는데, 몽크의 작곡 Pannonica나 사랑스러운 스탠더드 My One and Only Love는 정서가 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Fragments나 Gemini는 그 아방가르드함 때문에 잘 어울린다. Gemini는 부클릿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두 개의 즉흥 피아노 프리 솔로를 연주하고 사이에 베이스 솔로를 집어 넣었다. 녹음할 당시에는 각 솔로를 Apple Juice와 Tomato Juice라고 불렀다고.
인기곡 Windows도 빼놓을 수 없다. 앨범에 원래 수록된 What Was와 Now He Sings, Now He Sobs를 잇는 쓸쓸한 느낌의 왈츠로 아주 아름답다.
Panonnica와 My One and Only Love는 모두 칙 코리아 스타일로 개성 있고 훌륭하게 연주되었다고 생각한다. Panonnica에서는 몽크를 연상시키는 과격한 코드 보이싱과 함께 칙 코리아 특유의 깔끔함과 청명함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My One and Only Love는 칙 코리아의 서정성이 유감없이 창의적인 라인과 보이싱으로 드러난다. 마케팅용으로 앨범이 발매된 지 꽤 시간이 지나고 넣은 연주라지만, 넣어주셔서 그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만한 아름다운 연주다.
나오며
앨범을 관통하는 시적 심상은, 칙 코리아의 메모에서도 봤듯이 사실 The Law of Falling and Catching Up이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로부터 떨어진다. 하지만 떨어져야만 진정한 자신을 찾고 올라갈 수 있다-꽃이 져야 새 꽃이 피듯이. 이런 점에서 유한함은 아름다움과 대립되는게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존재는 유한함을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진정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이러한 주제의식 측면에서 이 앨범은 벨라스케스의 아름답지만 곧 질 것 같은 허망함을 불러오는 정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 이면에 깊게 내포된 쓸쓸함과 허망함.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정물이 그저 찬란한 정적인 순간을 보여줄 뿐이라면, 이 앨범에서 트리오의 연주는 화끈하게 한계까지 폭주하며 들이받는다.
이 앨범에서 또 언급하고 싶은 것은 곳곳에서 드러나는 아방가르드로의 충동이다. 아방가르드의 본질은 반(anti-)미학, 즉 기존의 미학을 부정하는데 있다. 기존의 이론과 체계로 쌓은 음악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체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열어보려는 적극적인 태도다.
기존의 형식을 유지한채 내용을 바꾸든(블루스 곡인 Matrix), 기존의 곡 코드 진행을 유지한채 내용을 바꾸든(콘트라팩트 곡인 Now He Beats the Drum, Now He Stops), 완전히 서양 음악 이론을 부정하고 새로운 소리를 탐구하든(The Law of Falling and Catching Up) 칙 코리아의 치열한 탐구는 현재까지의 블루스에서, 허튼날 연주되던 스탠더드 곡에서, 서양 음악에서 부족한 것을 인지함으로 기존의 것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올라간 멋진 사례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