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햄릿
들어가며
Who's there?
거기 누구냐?
햄릿의 첫 배경은 칠흑같이 어두워 앞의 대상을 식별하기 어려운 밤, 적과의 접경지인 엘시노어 성벽 위다.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울려퍼지는 극의 첫 대사, 관객에게 셰익스피어가 던지는 첫 마디는 너는 누구냐는 질문이다.
아주 단순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햄릿의 등장 인물들은 이 질문 앞에서 솔직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들 등장 인물들은 이 연극 안에서 자기 자신을 숨긴 채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클로디어스는 살인자가 아닌척하며 왕을 행세하며 살아간다. 햄릿은 미친척하며 자신의 복수심을 숨긴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감시자가 아닌 척 햄릿의 친구를 행세하며 살아간다.
허구로써 진실을 드러내는 예술
그렇다면 이들의 실체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햄릿은 클로디어스의 실체를 비추기 위해 연극을 기획한다. 연극은 예술이며 허구이지만, 이는 클로디어스의 양심을 제대로 비추어 그가 선왕의 살인범이라는 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거울은 양면 거울이다. 연극을 통해 햄릿은 클로디어스가 왕의 탈을 쓴 살인자임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클로디어스 또한 햄릿이 거짓으로 미쳤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연극이 끝나고,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바다 건너 영국으로 보내 죽이려고 한다. 햄릿이 짠 연극이 햄릿을 죽음으로 이끈 것이다.
햄릿 극 안에는 햄릿이 기획한 이 연극 외에도 또다른 짜고 치는 연극이 있다. 클로디어스가 기획한 검술 시합이다.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죽이기 위해 비열한 검술 시합을 기획하지만, 결국 그 비열한 술수로 마련한 독배와 독이 묻은 칼 모두 클로디어스를 죽음으로 이끈다. 물론 이는 비겁한 왕 시해자에게 알맞은 최후다.
이렇게 연극은 진실을 드러내지만(물론 폴로니우스가 3막에서 기획한 오필리어와 햄릿의 어설픈 연극은 햄릿의 거짓 광기만 드러낸다. 이는 연극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햄릿이 짠 연극은 햄릿을 죽음으로, 왕이 짠 검술 시합은 왕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점은, 모두 그저 신이 연출한 연극의 배우에 불과하다는, 모두를 겸손하게 만드는 진실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햄릿의 이런 극중 극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써 자신의 연극(예술)이 비록 허구일지라도 가장 예리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창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몹시 세련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존재의 복잡함과 모순
그래서 다시, 거기 너는 누구냐?
햄릿은 이 연기자들로 가득찬 거짓된 세상에서 자신만큼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라고 외친다.
"Seems," madam? Nay, it is. I know not "seems."
마마, "보인다"뇨? 실제로 그러합니다. 저는 "보인다"는 말을 모릅니다.
왕비가 하는, 자신이 슬퍼'보인다'는 말에 햄릿은 자신에게는 '보인다' 같은건 없다고 한다. 물론 햄릿은 진실로 슬펐다. 하지만 그렇게 외양과 실재의 간극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복수를 위해 미친척 연기를 한다. 또, 그림자들의 놀이이자 외양과 실재의 간극 그 자체인 연극을 즐기고 배우들을 후원한다.
I am but mad north-north-west: when the wind is southerly I know a hawk from a handsaw.
나는 단지 북북서로만 미쳤네.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매와 왜가리를 구분할 줄 알거든.
햄릿 본인도 이 이중성을 인정한다. 그는 자신이 북북서라는 아주 애매하고 정교한 방향으로만 미친 것이고, 때가 되면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돌려 말한다. 그렇다고 햄릿이 위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기보다 그는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는 진실로 슬퍼했으나, 동시에 필요에 따라 연기를 하고 연극을 즐긴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설정 오류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대개 그 경우 현재나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이라기보단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과 되고 싶은 모습의 간극은 햄릿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내적 갈등의 원인이 된다.
클로디어스는 거트루드의 남편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거트루드는 형의 아내였다. 이 간극에서 오는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클로디어스는 형을 죽이고 거트루드를 취한다. 오필리어는 자신의 생각과 햄릿에 대한 사랑이 있었지만 아버지 폴로니어스와 오빠 레어티즈에게 계속해서 억눌린다. 그렇게 내적으로 계속해서 간극이 쌓이던 오필리어는 폴로니어스가 죽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버린다.
햄릿은 마음 깊숙한 곳에선 행동하는 사람(군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현실에선 생각하는 사람(학자)이다.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배운 햄릿은 직접 유령을 만나 초현실적인 경험을 하고도 그의 말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걱정해 연극을 설계한다. 또, 그렇게 악인임이 밝혀진 클로디어스가 혼자 남았을 때도 참회하고 있을때 죽이면 영혼이 구원받을까봐 망설이며 죽이지 못한다. 전자는 신중한거라고 쳐도, 후자의 경우는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한 것이다. 구원이란게 애초에 한낯 인간에게 달린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부친이 잃은 별로 필요없는 땅이라도 명예를 위해 되찾고자 군대를 일으킨 포틴브라스나, 프랑스 파리에서 배우고 아버지의 죽음에 제대로된 장례를 치뤄주지 않았다고 냅다 반란을 일으키는 레어티즈는 행동하는 사람이다.
햄릿은 왜 행동하지 못하고, 생각하고 고뇌할까? 우선은 앞서 언급했듯, 햄릿의 말에 따르면 유령이 거짓을 말하는 악마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클로디어스가 참회하고 있을때 죽이면 그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처음 본 유령의 말을 믿고 왕을 죽인다는 것은 지나치게 경솔한 행동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To sleep—perchance to dream: ay, there's the rub, for in that sleep of death what dreams may come when we have shuffled off this mortal coil must give us pause.
잠을 자면 꿈을 꾸겠지. 맞아, 그것이 문제야. 사멸할 이 육신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죽음의 잠 속에서 우리는 무슨 꿈을 꾸게 될까? 그 때문에 우리는 망설이고 이 장구한 인생의 재난을 이어가는구나.
클로디어스를 죽인다는 것은, 또는 죽이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그는 1막 4장에서 호기롭게 이렇게 말한다.
두려울 게 무언가? 내 목숨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유령처럼 내 영혼도 불멸이긴 마찬가진데 저것이 내 영혼에 무슨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1막 4장, Hamlet의 대사
하지만 곧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이렇게 한탄한다.
시기가 어긋났군. 아, 빌어먹을 팔자. 이를 바로 맞추기 위해 태어나다니.— 1막 5장, Hamlet의 대사
복수를 해야한다고 마음 먹었으면서도 잘못 상황을 이해했을까 의심이 되고, 죽음이 두렵고, 참회하는 인간을 죽이면 그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을지도 모른다는 햄릿의 고민은 인간 존재의 모순과 사고의 복잡함, 그리고 윤리적 감수성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렇게까지 깊이 있게 인간이라는 존재를 포착해서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Let be, 명예로운 선택
그래서 다시, 거기 너는 누구냐?
햄릿은 행동하고자 하지만 생각하는 것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연극 아킬레스의 아들 피러스 이야기의 피러스에게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취해야할 행동을 본다. 또, 쥐꼬리만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먼 길을 온 포틴브라스의 군대를 보고 자신의 망설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햄릿은 말한다:
Rightly to be great is not to stir without great argument, but greatly to find quarrel in a straw when honor's at the stake.
진정한 위대함이란 큰 명분 없이는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명예가 걸려 있을 때에는 지푸라기 같은 일에도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심한다:
O, from this time forth, my thoughts be bloody, or be nothing worth!
아, 지금 이 시간부터 나의 생각이여, 무자비하라,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리.
바다라는 공간은 연극의 배경을 바꿀 뿐 아니라 햄릿의 마음가짐도 바꾼다. 바다로 떠났다가 해적을 만나 극적으로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햄릿은 그간 입고 있던 상복 같은 검은 옷을 벗어버리고 선원 같은 옷차림을 한다.
이후, 무덤 파는 사람으로부터 요릭의 해골을 보면서 모두가 결국엔 죽어 없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마침내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을 당당하게 밝힌다:
What is he whose grief bears such an emphasis? Whose phrase of sorrow conjures the wandering stars, and makes them stand like wonder-wounded hearers? This is I, Hamlet the Dane.
저렇게 탄식하는 자 도대체 누구냐? 그 통곡의 소리 너무나 커서 떠도는 별들도 놀라움에 질린 사람들처럼 걸음을 멈추는구나. 나는 덴마크 사람 햄릿이다.
오필리어의 무덤에서 울부짖고 있는 레어티즈에게 햄릿은 "나는 덴마크 사람 햄릿"이라며 스스로를 당당히 선언하며 무덤으로 뛰어든다. 유령의 말을 믿어도 될지, 죽음 이후엔 무엇이 있는지, 참회하는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이 구원받진 않을지 같은 의심과 고민을 늘 하던 햄릿은 자신을 덴마크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주인이라고 밝히며 무덤으로 뛰어드는, 행동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게 된 계기는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요릭의 해골 등을 통해 모두가 결국엔 죽음으로 평등하게 돌아간다는 진리를 보고 운명을 수용한 것이다.
Not a whit. We defy augury. There's a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e. If it be not to come,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the readiness is all. Since no man of aught he leaves knows, what is 't to leave betimes? Let be.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불길한 징조를 거부한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데도 신의 섭리가 있다지. 그게 지금이라면, 앞으로는 아니겠고,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일 것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아니라면 언젠가는 오겠지.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게 전부야. 죽을 때 무언가를 가지고 갈 수 없다면, 일찍 떠나는 게 무슨 문제지? 그냥 두자.
지금도, 앞으로도 아니라면 언젠가는 올 죽음을 준비하는 것, 그게 전부다. "To be or not to be"라며 고민하던 햄릿은 Let be, 그냥 흘러가는대로 두자고 결론 짓는다.
그렇게 햄릿은 행동하는 사람으로써 복수를 이루고 죽는다. 그가 행동하게 하는데 저도 모르게 영향을 미쳤던 포틴브라스는 이렇게 평한다:
Let four captains bear Hamlet like a soldier to the stage; for he was likely, had he been put on, to have proved most royally.
햄릿을 군인답게 단 위로 메고 가게 하라.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가장 훌륭한 왕이 되었을 인물이다.
그렇게 햄릿은 "기회가 주어졌다면 가장 훌륭한 왕이 되었을 인물"로, 군인과 같이 장례가 치러진다. 학자로 등장한 햄릿은 이렇게 군인으로 퇴장한다.
예정된 비극에서도 인간이 빛날 수 있는 길
햄릿은 복수를 이루었지만 이 연극은 비극이다. 클로디어스를 죽였지만 죽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햄릿도 죽으며 어머니 거트루드도 죽는다. 햄릿은 폴로니어스를 죽인다. 그 아들 레어티즈는 복수를 하고자 하나 복수 과정에서 레어티즈 본인도 죽는다. 그의 동생이었던 오필리어는 미친 상태로 자살한다. 로젠그란츠와 길덴스턴은 영국에서 죽는다. 오직 호레이쇼만이 살아남아 이 진실을 알린다.
하지만 이렇게 파멸적으로 극이 끝나는데도 햄릿이 주는 뒷맛은 허무하지 않고 여운이 길다. 포틴브라스의 마지막 대사는 이 파멸적인 결말을 명예롭고 고결하고 품위있게 느껴지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이 고통과 파멸이 불가피한 햄릿의 인생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이야기 한다. 인간의 생각, 의심, 선택, 행동을 이야기한다.
햄릿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시기를 탓했다가(1막 5장), 파멸적인 결말을 직접 선택하고 죽음을 성숙한 자세로 맞이한다. 햄릿은 말한다:
It will be short; the interim is mine.
곧 끝이 온다. 하지만 그 사이의 시간은 내 것이다.
인생은 짧고 곧 끝이 온다. 그 끝이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햄릿은 그 사이의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선포하고 깊은 고뇌 끝에 확고한 선택을 하고 실행한다. 그의 실행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본인도 목숨을 잃었지만, 호레이쇼는 진실되게 산 그를 기억하고 포틴브라스에게 전달한다.
모두가 죽음으로 평등하게 돌아가는 짧은 인생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고, 세상에 변화를 주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햄릿을 덮고, 내게 다시금 물어본다. 거기 너는 누구냐?
그외: 번역에 관해서
물론 이 포스트는 번역의 우열을 가리려는 목적이 아니다. 다만 워낙에 다양한 번역이 있는 명작을 읽는 것인지라 가급적 좋은 번역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에 우선 인터넷에 검색을 했고, 추천을 많이 받은 김재남 역을 우선 읽었다.
두 번을 읽은 이후에는 이전에 리처드 2세를 읽을 때 좋은 인상을 받은 박우수 역으로 두 번 더 읽어보았다. 이후 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한 방향을 정하고 쓰다보면 미처 못 말하게 되는 부분이 생기고, 여러가지를 다 담으려다보면 갈팡질팡 아무 주제도 없는 글이 되어버려 몇번을 더 읽고 글을 쓰게 되었다. 그만큼 햄릿이라는 텍스트는 읽으면 읽을수록, 리뷰를 쓰려면 쓸수록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김재남 역은 대화체가 반말이고 격식없이 되어 있고, 직역을 한 듯한 느낌이 들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박우수 역은 줄을 잘 나눠두었고 대화가 사극체여서 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런점에서 개인적으로는 박우수 역을 추천한다.
하지만 또 어떤 부분들을 비교하면 김재남 역이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어떤 임팩트 있는 대사들은 박우수 역에선 너무 평범하게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3막 4장의 "친절하려다 보니 잔인하게 되었습니다"(박우수 역)는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반면 "자식된 자로서 간언을 하자니 이렇게 너무 가혹하게 될 수밖에 없지요"(김재남 역)는 이해가 된다. 이런 점에서 난 김재남 역을 먼저 읽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한 상태에서, 이해가 덜 된 부분을 이후에 읽은 박우수 역의 다른 말로 읽어서 보다 이해가 잘 되었고, 이에 편향된 평가를 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박우수 역은 작품 맨 끝의 역자 해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이고 햄릿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오며
앞서 언급했듯 여러번 읽게되는 책이었고, 한 방향으로 글을 쓰려면 다른 이야기들을 할 수 없어 글을 다시 기획하고, 다시 기획하는 일이 반복되다가 마침내 (생각하는 인간에서 행동하는 인간이 되고자) 글을 어찌저찌 마무리 지었다.
여전히 하고 싶지만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유령의 정체에 관한 생각(아버지의 억울한 원혼인지, 그 대리자인지, 정의의 화신인지, 죽음의 사신인지, 악마인지)이라던가, 거트루드의 정체(방조자인지, 공범인지, 무지한 피해자인지 등)라던가, 윤리적 모호함이라던가(햄릿은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도 죽인다. 무덤 파는 사람도 함부로 대한다.), 오필리어가 미치게 되는 과정이라던가, 햄릿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제 있었던 일인지, 즉 햄릿이 정신병에 걸린것은 아닐까라던가(거트루드는 유령을 보지 못한다)...
그만큼 햄릿은 짧은 길이 안에 엄청나게 다층적이고 복잡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텍스트이고, 기억하고 싶은 대사도 몹시 많은 작품이었다. 우선은 여기서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는 원문으로 한 문장, 한 문장 다시금 깊이있게 읽고 싶은 작품이라고 마음에 자물쇠를 채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