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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William Shakespeare·박우수

리처드 2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한없이 덧없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

May 7, 2025

BookEnglish Literature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2절)

들어가며

아내와 파주의 지지향으로 북케이션을 갔을 때 읽었던 두 권의 책들 중 하나다. 많은 책들 중 고르게 된 계기는, 열린책들 출판사의 책들을 모아둔 코너에서 집으로 가기 3시간 전에 골라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던 중 꽤 얇은데다가 희곡이었던 이 책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잉글랜드를 호령하던 왕 리처드 2세는 내 눈 앞에서 단 3시간만에 완전히 몰락했다.

높은 위치였기에 더 빨랐던 몰락

시작만 해도 두 귀족을 중재하다가 그들에게 온갖 입발린 말을 들으며 결국 결투를 허용해주고, 결투 당일날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모두를 추방해버리는 리처드 2세는 위풍당당했다. 그의 행동은 변덕스러웠지만, 대사에는 품위가 있었고 그런 그를 둘러싼 높은 대신들과 귀족들의 말들도 하나같이 존경과 복종심에 가득차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래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몰락은 무섭도록 빨랐다. 곤트의 존이 죽고 불링브루크가 복귀하면서, 책의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한 장마다 리처드 2세의 세력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리처드 2세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부르짖는다.

"그 거울을 이리 주시오. 거기 비친 모습을 읽어 보겠소. 아직 깊은 주름이 늘지는 않았다고? 슬픔이 그렇게 많이 이 얼굴을 강타했는데도 깊은 주름이 안 파였다는 말인가? 아, 아첨꾼 거울아. 호시절의 내 추종자들처럼 너는 나를 잘도 속이는구나. 이것이 매일같이 왕실 지붕 밑에 있던 1만 명을 거느렸던 얼굴이란 말인가? 이것이 태양처럼 보는 사람의 눈을 감게 만들었던 얼굴이란 말인가? 깨지기 쉬운 영광이 이 얼굴에서 빛나고 있구나. 깨지기 쉬운 영광 같은 얼굴아. (거울을 박살 낸다) 1백 개의 조각들로 깨져 버려라."
4막 1장

처절하게 몰락하여 결국 죽임을 당한 리처드 2세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한때 그에게 아부했던 신하들에게 큰 죄책감을 주었을까? 헨리 4세로 즉위한 불링브루크의 대사로 인해 리처드 2세는 그의 왕위를 찬탈한 자에게 약간의 형식적인 동정을 받고 그대로 그렇게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를 죽인 엑스턴은 헨리 4세에 따르면 "양심의 가책이나" 받아야 한다.

독약이 필요한 자는 독약을 싫어하는 법이오. 나 역시 그대를 좋아하지 않소. 내 비록 그가 죽기를 바랐지만 나는 살인자를 증오하고, 피살자를 사랑하오. 그대 수고의 대가로 나의 칭찬이나 왕의 호의 대신 양심의 가책이나 받으시오. 카인과 함께 어두운 밤을 떠돌고 결단코 그대 머리가 눈에 띄지 않게 하시오. 제신들이여, 내가 피의 거름을 먹고 자라나야 하다니 내 영혼은 심히 괴롭소이다. 자, 다들 나와 함께 리처드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즉시 검은 상복을 입읍시다. 내 이 죄 많은 손에서 이 피를 씻어 내기 위하여 성지를 향한 항해에 나서겠소. 엄숙하게 다들 나를 따르시오."
6막

헨리 4세는 "내 영혼은 심히 괴롭소이다"라고 했지만, 퍽이나 그럴 노릇이다. 내게 이 대사는 일종의 티배깅(tea-bagging)으로 느껴졌다. 이 사건(1399년)이 있은지 어언 600년 뒤에, 이 사건을 토대로 만든 희곡의 번역본을 파주의 한 조용한 카페에서 읽은 내가 아마 헨리 4세보다 더 애통함을 느꼈을 것이다.

권력에 대한 성찰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던 왕이 엄청나게 빠른 시간 만에 몰락하고 잊혀지는 과정을 보면 신분제 시절이라 누구도 감히 꿈꿔선 안될 왕이라는 자리조차 정말 덧없다고 느낀다.

신분제가 완전히 철폐된 오늘날은 어떤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어도 불과 5년도 안되어 수많은 국민들의 시위를 마주하고, 탄핵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두 개를 모두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보고 또 보았다.

리처드 2세는 그의 왕권을 믿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얻거나 상황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시작에서 나오는 불링브루크와 모브레이의 결투 신청에서도, 그는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뭔가를 했다기보단 일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편한 길을 택했다가, 또 이후엔 그걸 뒤집는다.

권력이라는 것은, 심지어 왕정 시대에서도, 사람에게서 나온다. 무인도의 왕은 왕이 아닌 것이고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왕은 핏줄이 왕이어도 사실상 왕이 아닌 것이다. 비단 정치에서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도, 동아리에서도, 가족에서도 권력은 아랫 사람 또는 주위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나오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얻어진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존경심과 순응심은 핏줄이나 위치로만 얻을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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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대상은 없지만, 몰입감 있게 책을 읽고 나서 박우수님의 번역도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인문, 즉 사람이 그리는 패턴이라는 것은 자연이 그리는 패턴(과학)만큼 견고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고전을 읽을 때면 상당히 견고해 보이곤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 또한 600년 전 사건을 그보다 120년 정도 뒤에 각색한 희곡이지만, 500여년 정도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하는 권력은 덧없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모든 반짝이는 것들, 위엄있어 보이는 것들, 무서워보이는 것들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진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