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자식
들어가며
며칠 전 피츠제럴드 단편선을 집어들 때 생각난 섬세하고 다정한 표현력을 가진 또 하나의 작가는 이반 투르게네프였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접한 적은 없었다. 다만, 나보코프가 그의 작품을 부드럽게 채색된 수채화 같은 그림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표현력과 관찰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는 동기로 피츠제럴드 단편선을 읽고 나서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에 마침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하는 아버지와 자식이 보였다.
사실 제목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불효자가 모든 과오를 뉘우치고 감동적으로 집에 돌아오는 얘기일지...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출생의 비밀에 관한 얘기일지...
나중에 찾아보니 이 책은 <아버지들과 자식들>, 즉 복수형으로 표현되는 것이 의미상 맞다. 러시아어 원제 Отцы и дѣти는 각각 복수형으로 아버지들과 자식들을 표기하고 있으며, 이에 영어도 Fathers and Sons라고 번역했다. 즉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를 대비하는 제목으로, 책 내용도 정확히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차이 및 그로 인한 갈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들과 자식들이라니, 얼마나 (더) 읽기 싫은 멋대가리 없는 제목인가. 스스로 좀 더 나은 번역이 없을까 고민하고 이게 최선이었음을 깨달은 3분은 번역가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기 좋은 시간이었다.
내가 읽은 민음사 판본의 번역가 연진희 님은 책 끝에 아주 훌륭한 작품 해설을 적어주셨는데, 여기서도 원제가 '아버지들과 아이들' 또는 '아버지들과 자식들'이 그대로 옮긴 번역임을 적어두었다.
1860년대 러시아의 생생한 현실로의 초대
이 책은 굉장히 시대에 충실하다. 첫 시작부터 1859년 5월 20일, 러시아의 시골 마을이라는 굉장히 세부적인 배경을 제시한다. '아버지들'에 해당하는 니콜라이와 파벨 페트로비치는 40년대에 젊음을 겪었던 이들이며, '자식들'에 해당하는 아르카지와 예브게니 바자로프는 이제 60년대에 막, 또는 한참 젊은 시기를 겪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정확히 해당 시대에 해당 배경을 가졌던 사람들로써 가질만한 생각들과 행동, 말투와 옷차림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파벨 페트로비치는 아프더라도 수염에 향기로운 오드콜로뉴를 뿌리고 라틴어와 불어, 영어를 종종 섞어 말하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푸시킨의 낭만적인 시를 읽으며 첼로로 슈베르트를 연주한다.
반면 바자로프는, 아르카지의 말을 빌리면 니힐리스트로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바자로프 본인에 따르면 새로운 건설을 위해 터를 깨끗이 치우는 사람이다.
이처럼 시대에 충실한 소설이기 때문에 이 책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역사적 배경을 어느 정도 알아야하고, 역사적 배경을 잘 알 수록 더 책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민음사 판의 연진희 님 번역 판본을 고른 것은 (우연이었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곳곳에 길지만 읽고나면 읽기를 잘했다고 느껴지는 친절한 주석들이 있고, 책의 맨 마지막엔 여러번 읽어도 좋은 꼼꼼한 작품 해설이 있기 때문이다.
1812년, 나폴레옹이 유럽을 차례차례 함락하고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점령했다가 러시아에게 파리까지 역으로 쫓긴 그 해, 러시아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서유럽을 찬양하고 모방하다가 어느새 자신들이 파리까지 들어온 강대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놀란다. 또, 러시아 귀족들은 전쟁에서 자신들과 함께 싸운 농노들이 사유 재산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인간임을 깨닫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을 틔운 귀족들이 돌아온 러시아에서는 후진적 전제 정치와 농노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귀족과 장교들은 입헌 군주제와 농노 해방을 주장하며 의거를 일으켰지만, 니콜라이 1세는 이들을 진압한다. 니콜라이 1세가 1855년에 죽기까지 러시아는 암흑의 시기를 겪는다.
따라서 암흑의 시기를 겪은 니콜라이와 파벨은 자유주의적 서유럽 철학들은 접했으나 니콜라이 1세 시대에서 딱히 그 이상을 펼칠 기회는 없던지라 무력하지만, 낭만주의적 성향이 있다. 반면, 자식 세대인 바자로프와 아르카지는 그런 암흑 시기를 청산하기 위해 구식의 모든걸 부정하고 자연 과학의 법칙과 이성만을 신뢰하며 예술도 사회의 변화에 기여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 책 전반에 걸친 갈등 구조는 이런 철저한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며, 절정은 물론 파벨과 바자로프의 결투 장면이다.
시대에 충실함으로 시대를 초월하다
하지만 이런 철저한 시대적 배경 탓에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지 못하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보수적인 이전 세대와 급진적인 새 세대의 갈등은 1860년대 러시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 어느 장소에나 있었다. 다른 장소와 시점에선 다른 형태로 변주되었을 뿐, 세대 간의 갈등은 항상 있어왔고 오늘날에도 물론 지속 중이다.
투르게네프의 이 작품이 단순히 해당 시대에만 의미를 지니는게 아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투르게네프가 정말 섬세하게 이 갈등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니콜라이와 파벨은 무능해보이지만, 이들이 자식 세대를 대하는 태도나 행동들은 분명 품위가 있고 존중받을만해 보인다. 바자로프는 아주 영민하지만, 특별히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진 못하고 심지어 후반엔 자신이 경멸해오던 사랑에 빠져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어느 한쪽 편을 들며 이쪽이 맞다, 저쪽이 맞다고 교훈을 주려는 태도 대신, 투르게네프는 서로 다른 세대간의 입장을 모두 설득력 있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질투, 가족애, 사랑 등의 보편적이고 복잡한 삶의 감정들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풀어냄으로 세대 간의 갈등 또한 다른 인생사의 다양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일부임을 드러낸다.
투르게네프는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당대에는 큰 논란이 되며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세대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소설 마지막 문장에, 바자로프의 묘 위에 자란 꽃을 통해 작가는 본인이 추구하고자 한 소설의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고 반항적인 심장이 묘 안에 감춰져 있더라도, 그 위에 자란 꽃들은 순수한 눈으로 고요하게 우리를 바라본다. 그 꽃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영원한 평화,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화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한한 생에 대해서도 말한다......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말싸움(그리고 마지막엔 아주 긴장되지만 사실 약간은 어설픈 총싸움)과 그리 복잡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 이렇게 단순해보이는 소설이지만 이 책은 아주 흡입력 있었다. 투르게네프의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과 면밀한 관찰력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표현 덕이라고 생각한다.
아르카지가 처음으로 카챠에게 자신의 마음을 살짝이나마 드러낸 순간은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책을 읽고 있지만 아주 생생하게 "소녀를 짝사랑하는 소년이 수줍게 고백을 하고 소녀가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모습"을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요? 음, 이제 보니 내가 당신의 관찰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 같습니다."
"왜요?"
아르카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카챠는 바구니에서 빵 부스러기를 좀 더 찾아내 참새들에게 던져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너무 세차게 움직이는 바람에 참새들은 부스러기를 쪼아 먹을 새도 없이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카체리나 세르게예브나!" 문득 아르카지가 말을 꺼냈다. "아마 당신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내가 당신을 언니 뿐 아니라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아줘요."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가 버렸다.
카챠는 두 손을 바구니와 함께 무릎에 떨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아르카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에 서서히 홍조가 떠올랐다. 그러나 입술은 미소를 띠지 않았고, 검은 눈동자는 의혹과 아직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이 고백 미수(?) 장면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후 정식 프러포즈 장면은 더 아름답다.
"... 얼마 전 난 어떤 감정 덕분에 눈을 떴습니다.... 완전히 분명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날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카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아르카지를 쳐다 보지도 않았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한층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의 머리 위 자작나무 잎사귀 틈에서 피리새 한 마리가 태평하게 노래를 불렀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한마디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속내를 보여 주는 것이 정직한 모든 사람들의 의무라고요. 그래서 나도......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아주 쑥스러워하지만 용기가 느껴지는 고백은 바자로프와 오진초바에 의해 잠시 멈췄다가 해피 엔딩을 맞는다.
"네." 카챠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번에는 그도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두 손을 잡고는 큰 기쁨에 숨을 헐떡이며 그 손을 자기 가슴에 댔다. 간신히 서서 "카챠, 카챠."하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카챠는 어째서인지 천진하게 울음을 터뜨렸고, 스스로도 자신의 눈물을 조롱하며 조용히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에서 그런 눈물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감사와 수치심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군데군데 나오는 러시아 시골 자연에 대한 묘사들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나보코프가 말한 "부드럽게 채색된 수채화"가 연상되는 장면들이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이 작품에서 아마 누구보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그가 고뇌하는 눈으로 보여준 자연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하지만 시를 거부하다니?'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예술과 자연에 공명하지 않는다는 건......?'
그러고는 어떻게 자연에 공명하지 않을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정원에서 0.5베르스타 떨어진 작은 사시나무 숲 너머로 해가 자취를 감추었다. 숲 그림자가 잠잠한 들판을 가로지르며 끝없이 펼쳐졌다. (...) 숲속으로 스며든 햇살이 빽빽하게 우거진 초목들 사이를 헤치며 사시나무 가지들을 매우 따뜻한 빛으로 감쌌다. 그 가지들이 소나무 가지로 보일 만큼 부드러운 빛이었다. 한편 사시나무 잎사귀는 거의 파랗게 보였고, 그 위로 붉은 노을빛에 옅게 물든 창백한 담청색 하늘이 높게 펼쳐졌다. 제비들이 높이 날아다니고, 바람 한 줄기 불지 않았다. 뒤늦게 돌아온 꿀벌들이 라일락 꽃 속에서 졸린듯 나른하게 윙윙거렸다. 등에 떼가 외로이 길게 뻗은 가지 위에서 기둥을 이룬 채 빈둥거렸다.
나오며
한 달 뒤 첫 아이가 나올 것을 기다리는 30대 초반의 나는 이제 '아버지' 세대로 향하고 있다. 이미 나는 20대 친구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겨'(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아예 20대 친구들과 얘기할 일이 없다) 이야기를 해보면 생각의 차이를 느낀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들도 선명히 기억이 나지만, 젊은 친구들을 더 이상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당황감도 생생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슬픈 독백이 이해가 되는 인생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삼십 분 후,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정원에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정자 쪽으로 향했다. 그는 서글픈 생각에 사로잡혔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과 아들의 단절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 거리는 나날이 더욱 벌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결국 겨울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내리 며칠을 집에 틀여박혀 신작들을 읽은 것도 헛수고가 됐다. 청년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것도 헛일이 됐다. 그들의 격렬한 대화에 끼여 한마디 거들고 기뻐하던 것도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형은 우리가 옳다고 말하지.' 그는 생각했다.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고 생각해봐도 그들은 우리보다 진실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는 우리가 갖지 못한 무언가가, 우리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있는게 느껴져...... 젊음인가? 아냐, 젊음만은 아냐. 귀족 기질의 흔적이 우리보다 적다는게 바로 그 우월함 아닐까?'
이것이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지, 아쉬움인지, 윗 세대가 그래도 결국엔 더 많이 안다는 자부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대간의 생각 차이라는 것은, 투르게네프가 보여주듯 질투, 사랑, 가족애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하나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자식뻘인 바자로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난 당신을 이해할 영광을 갖지 못했습니다."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를 이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겪어온 상황, 처해있는 상황, 앞으로 닥칠 미래가 모두에게 너무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파벨처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적어도 "당신을 이해할 영광을 갖지 못했다"라고 겸손할 수 있다. 파벨처럼 상대를 존중하는 것은 세대를 초월해서도 멋진 행동으로 보인다.
어쨌든 세상은 계속 바뀌어왔고, 바뀔 것이고, 세대 간의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다른 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이해가 안된다"고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가 비웃어줄 아주 좁은 생각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세대의 다른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은 가족애, 사랑, 질투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고, 이것이 있기에 삶이 있는 것이다.
영원한 갈등과 화해, 그것이 삶의 본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