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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꽃피움
Ann-Kristin Hamm

미완의 꽃피움

자연을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이 그려낸 서정적 추상회화

May 31, 2025

Exhibition

들어가며

K&L Museum에서 25년 4월부터 6월까지 진행하는 독일의 현대미술 작가 앤-크리스틴 함(Ann-Kristin Hamm)님의 개인전, 미완의 꽃피움에 다녀왔다.

이번 전시는 K&L 뮤지엄 인스타그램에서 공지한 도슨트 투어에 맞춰 갔는데, 작가님과 오랜 대화를 나누며 작품을 깊이있게 이해하려고 하시고 그걸 최대한 전달해주시려고 한 친절한 도슨트님 덕분에 보다 깊이 있고 즐거운 감상을 할 수 있었다.

entrance
기존에 3층에 있던 카페가 1층으로 내려왔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작품들을 볼 수 있게한 기획은 좋았지만 대신에 메인 작품의 일부가 가리는게 아쉬웠다. 카페는 별도 건물로 옮기는 중이라고 한다.

집 근처의 K&L 뮤지엄을 지날때마다 밖에 걸려있는 현수막의 거대한 추상회화가 눈을 사로잡았는데, 그때마다 추상회화임에도 불구하고 참 특이하게 고전적인 기준으로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마치 아름다운 꽃밭, 정원을 볼 때의 화사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물론 꽃밭이나 정원을 그린게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했지만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하얀 건물의 하얀 현수막에 내리쬘때 거대한 추상회화는 주변 자연환경과 어울려 어색함이 없었다.

내면으로의 초대

main painting
이미지 출처 : #
관람객은 앤-크리스틴 함이 K&L 미술관에서 본 전시를 위해 직접 그린 그림을 가장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가장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앤-크리스팀 함 작가가 직접 이 미술관에서 그린 대형 추상회화이다. 거대한 캔버스의 양 옆에 두껍고 굳건해보이는 무지갯빛 기둥들이 있고, 위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무지개와 꽃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요소들이 있다. 그 아래로, 즉 캔버스의 가운데 및 아랫 공간에는 꽤 넓은 빈 공간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기둥이나 위의 장식적 요소들, 그리고 빈 공간의 배치도 그렇지만 특히 전시의 가장 처음에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작가 자신의 작품 세계와 마음으로 향하는 문을 의도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꽃들이 빛나는 햇살과 함께 관람객을 활짝 맞이하는 거대한 문, 그리고 그 문은 자신의 감정과 삶을 담아낸 작품 세계로 이어진다.

앤-크리스틴 함의 거대한 추상회화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아마 화면 양 끝에 있는 기둥들일 것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기둥들은 한계지을 수 없고 끝이 없는 자신의 추상적인 마음을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 어느 정도 경계를 치는 것이라고 한다.

pillars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경계선을 긋는, 캔버스 양 옆의 기둥들

구상적인 추상회화

working on painting
상당히 구상적으로 추상회화 작업을 하는 앤-크리스틴 함 작가. 작업 과정을 보면 기둥으로 우선 틀을 그리고, 이후 구성 요소들을 섬세하게 배치한다.

관람객은 2층의 난간에서 메인 작품을 바라볼 수 있고, 또 어떻게 이 메인 작품이 제작되었는지를 담은 영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앤-크리스틴 함은 추상회화 화가 중에서도 특히나 체계적으로 작업을 하는 편이다. 우연의 효과를 활용한다거나 즉흥적인 영감을 바로바로 거침없이 화폭에 옮기기보단 그림을 그리는 지금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과 같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구상한 후 그림으로 섬세하게 옮긴다.

앤-크리스틴 함은 '그리기의 행위' 자체를 강조하며, 삶 속에서 발견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적 반응과 직관을 회화 속에 녹여낸다.
안내 책자 중

도슨트의 설명에 의하면, 앤-크리스틴 함은 작업 중 때때로 '실수했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머릿속에 의도한 이미지와 다소 어긋난 터치가 나오거나 형상이 그려지면, 작가는 그 순간에 해당 이미지와 그것을 본 자신의 감정, 직관을 관찰하며 작품을 다시금 구상하여 만들어 나간다.

그녀를 둘러싼 온도, 직감, 갈망과 같은 무형의 감각에 집중하며 캔버스 위에서 끊임없이 탐색한다.
안내 책자 중

그렇기에 앤-크리스틴 함의 작품은 어느 정도 구상을 거쳐 나온 체계적인 회화작품이지만 자신의 순간순간 감정에 충실하고 주변의 시간, 공간적 환경들에 반응한 직관적인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생명력이 느껴진다. 구상적인 회화이지만 차갑지 않고 따스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

앤-크리스틴 함의 작품은 멀리서 보았을때 한 눈에 여러 반복적인 모티프들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모티프들은 주로 자연의 대상들을 연상시켰는데, 개인적으로는 꽃이나 씨, 또는 나비 등이 떠올랐다. 이런 반복적인 모티프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의 추상이 구상을 토대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motifs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들은 자연의 대상을 연상시킨다.

이런 반복된 아름다운 모티프들이 화면 전체에 일관성과 균형을 주기에 멀리서 바라본 앤-크리스틴 함의 작품은 한눈에 봐도 아름답다. 색감도 오묘하고 조화로운데, 이 색감을 보다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좀 더 가까이서 보면 느껴지는 것은 놀라운 디테일이다.

details
가까이서 바라본 앤-크리스틴 함의 작품들에선 아주 아름다운 형태들, 색들의 디테일에 놀라게 된다.

어느 특정 부분을 관찰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가 아름다운 부분에 반해 면, 선 등을 따라가며 또 다른 섬세한 디테일들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전체적으로 참 아름답고 밝았다. 마치 환상의 정원에 핀, 여러가지 서로 다른 아름다운 꽃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전시를 관람하며 먼저 전체를 보고 특정 부분에 집중해 주위로 뻗어나가도 보고, 또 부분의 특정 모티프에서 시작해 전체로 뻗어나가며 작품을 감상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해서 느낄 수 있던 감정은 밝음과 아름다움, 행복함이었다.

hapiness
전체도, 디테일도 밝고 아름다워 왠지모를 기쁨과 행복을 주었던 앤-크리스틴 함의 작품들.

자연과 선배들에게 영향을 받은 초기작들

1층이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이라면, 2층은 앤-크리스틴 함의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알베르트 올렌(Albert Oehlen) 등을 사사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어떤 작품들에서 호안 미로가, 어떤 작품들에선 조지아 오키프가 느껴지는듯 했다.

실제로 그녀가 밝히기로는 독일에서 회화를 배우며 청기사파(바실리 칸딘스키 등)의 전통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미국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받은 등 현대에서 어느 한 쪽의 영향에만 치우치지는 않은 작품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초기 작품들은 환상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여성적인 서정성이 담긴 작품들이었다.

early works
앤-크리스틴 함의 초기 작품들은 최신 작품들과는 꽤 많이 다르지만 환상적이면서 따뜻한 서정성은 그대로인듯 했다.

그녀의 추상회화에서 자꾸 이라는 요소가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초기에 그녀는 상당히 많은 꽃들을 그렸고, 마치 동양화처럼 여백과 꽃으로 완성한 작품들은 그녀의 전반적인 작품들이 품고 있는 따스함과 밝은 생명력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여주는것 같았다.

flowers
K&L 뮤지엄 2층으로 가는 곳에는 직사각형 창문이 있고, 밖에는 벚나무가 있다. 벚나무가 보이는 창 옆의 햇살 가득한 곳에 그녀의 꽃 그림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nature motifs
그녀의 따스하고 아름다운 추상이 자연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하는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로스코의 화면처럼 숭고하게 불타오르거나 호안 미로의 추상처럼 꿈과 같은 환상을 주지는 않지만, 그녀의 작품은 내게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의 밝은 느낌과 서정, 행복을 주었다.

나오며

초여름의 강렬한 햇살이 K&L 뮤지엄의 하얀 벽을 비추는 날에 감상하기에 좋은 산뜻한 전시였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한다고 하고, 언어가 자기 세계의 한계라고(비트겐슈타인) 말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고 한다. 앤-크리스틴 함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그로 인해 느끼는 감정과 직관이라는, 언어 이전의 것들을 거대한 캔버스들에 추상회화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게 그녀가 보여준 그녀의 작품 세계, 마음은 몹시 따뜻하고 행복한 자연의 것이었다고 느꼈다.